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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관악산 연주암, 비운의 왕세자 효령대군의 사찰(2)

by 3000포석정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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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은 경기도 과천시와 안양시, 서울 관악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많은 등산객이 즐겨 찾는 서울 근교의 명산이다. 아마도 서울 근교에 있는 산 중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산이 아닐까 한다. 산행 가기 좋은 주말이면 서울대 관악산 입구에는 가족들, 연인들, 등산동호회 모임 인파들로 넘쳐난다.

 

특히 다른 산과 다르게 젊은이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산이다. 시내에서 언제든지 갈 수 있게 접근성이 편해 가벼운 옷차림으로 친구들끼리, 연인끼리 가벼운 산행을 즐길 수 있고 산정상에 올라서면 저 멀리 북한산 등 서울 전역을 볼 수 있는 풍광 또한 아름답다. 관악산 정상에는 아주 너른 바위로, 가운데 자연석에는 '관악산 629m'라고 새겨 놓았다.

 

연주암의 창건

관악산은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봉우리가 철 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도 하였다. 송도의 송악산, 가평의 화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과 함께 경기 오악에 속했던 산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도읍지를 옮기면서 남쪽의 뾰족한 관악산은 화덕을 가진 산으로 조선초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를 끄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를 만들어 세우게 한 불기운의 산이라는 유래도 있다.

 

『관악산 연주암지(1932)』에 의하면 본래 연주암은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좌선하며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 그 후 1392년 조선 태조가 의상대를 중창하고 '연주대'라 개칭했다. 연주암은 관악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연주대는 연주암의 꽃이다.

 

<관악산 연주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기도도량으로서 연주암

경기도기념물 20호인 연주대는 관악산의 상징이다. 제일봉인 연주봉의 기암절벽이 연주대이다. 연주대는 기암절벽이자 암자로, 높은 산정에 자리한 연주암의 꽃이기도 하다. 연주대는 화강암의 수직절리가 탁월한 기암절벽이며, 절벽에 이십여 단의 석축을 쌓아 마련한 기도 도량이다. 연주대 축대 위에는 한 칸 규모의 응진전이 자리한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좌우 협시불로, 그 뒤로는 십육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 옆 암벽에 마련된 작은 감실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봉안돼 있다. 특히 약사여래입상은 고려 중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연주대 응진전은 산정에 위치한 기도 도량으로 불자들에게 '나한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불교에서 나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은 온갖 번뇌와 생사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다. 번뇌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중생의 몸에서 부처의 몸으로 향상된 것이니 나한은 바로 부처다. 그래서 깍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 위에 앉아 있는 연주대 응진전에는 세속의 때를 벗기 위해 기도하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 기도가 영험한 도량으로 이름난 연주암에서도 명당에 자리하다 보니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들이 절벽 끝으로 모인다.

 

 

 

효령대군과 관련된 연주암 유래

연주암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유래담이 전해진다. 첫 번째는 고려 말의 충신이었던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고려 왕조가 멸망하자 산에 은신하였는데, 이때 이들이 찾은 곳이 관악산 의상대였으며, 여기서 멀리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그리워했으므로 연주대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의 아들과 관련된 내용으로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인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이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섰고 두 대군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하며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려고 하였으나 그럴수록 더욱 힘이 들었고,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멀리 보였으므로 40칸 규모의 건물을 지어 현재의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이후에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그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연주암 대웅전과 삼층석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관악산 정상에선 맑은 날 북쪽으로 개성 송악산, 서쪽으로는 인천 송도와 평택 당진간 서해대교를 볼 수도 있다. 또 조선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그가 쓴 『관악산 유람기』에 "관악산은 영주대가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勝景)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다고 산승(山僧)이 말하자, 북쪽으로 올라 의상봉, 관악사와 원각사 두 절을 지나서 영주대 아래에 이르러 영주암(靈珠庵, 현 연주암)에서 쉬고, 마침내 영주대에 올랐다.

 

돌을 뚫어서 층계를 만들었는데 사람 하나 들어갈만한 바위틈을 따라서 가장자리를 붙잡고 조금씩 올라가 빙 돌아서 대의 꼭대기에 이르니, 삼면은 막힘없이 전부 바라보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벽이 서 있었다. 벽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고 다시 돌로 처마를 만들어 불사을 덮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단을 쌓았는데 돌을 쌓고 흙을 채워서 50여 명은 앉을만하였으며, 바위 머리에 또 구멍을 파 등불 밝힐 곳을 만들었다"라고 영주대를 둘러본 일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효령대군의 사찰 연주암

연주암 한편에는 효령각이 자리하고 있다. 효령각에는 효령대군 영정이 모셔져 있다.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효령대군(1396~1486)은 양녕대군과 함께 2년여 연주암에 머물려 연주암을 중창하였다.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암사와 원각사를 일으키는 데 힘써 조선전기 불교 중흥에 큰 공을 남긴 인물이다. 이같이 불교를 숭상한 그의 행적은 오늘날 연주암에 영정이 남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효령각 주련은 임금 자리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대군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출자왕궁통불역(出自王宮通佛域) 앙첨천국상선대(仰瞻天國上仙臺)

스스로 왕궁을 나와 부처님 세계로 들어와 영주대 높은 곳에서 우러러 불국을 바라보네"

당시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마음을 다스렸던 효령대군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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