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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등산 여행

안성 서운산과 석남사('도깨비' 촬영지)

by 3000포석정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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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철 산사 산행은 한 편의 아름다운 마음의 시를 읊는 것과도 같다. 산에 드는 것만으로도 몸이 정화되고, 사찰에 들어서면 영혼조차 씻기는 느낌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계절을 음미할 수 있는 산사 산행지로 안성 서운산만큼 안성맞춤인 곳이 있을까.

 

 

경기도 안성시와 충북 진천군의 경계에 자리한 서운산(548m)은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단풍나무숲이 울창한 서운산 자락엔 10여 개의 사찰이 흩어져 있다. 그중 서운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남사당의 본거지인 청룡사와 드라마 '도깨비' 촬영 장소인 동쪽의 석남사가 유명하다.

 

또한 산중에는 '조망이 탁 트인다'는 탕흉대, 온화한 미소가 아름다운 석조여래입상, 돌부처와 용이 같이 살았다는 용굴, 좌성사 가는 길의 환상적인 단풍나무숲터널, 태조 왕건이 3년간 은거했다는 은적암, 발가락이 앙증맞게 양각된 5.3m의 마애여래입상 등 이야기보따리가 한가득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과 이덕남 장군이 축성한 길이 700m의 토성인 서운산성이 남아 있어 역사의 흔적도 느낄 수 있다.

 

 

서운산 등산(산행)코스

석남사를 원점회귀 산행 기점으로 삼아 정상에 오른 후 탕흉대, 좌성사, 은적암에 이르는 남쪽 산자락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정상에 다시 올라 마애여래입상 코스로 하산 산행 코스이다.

 

석남사에서 서운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등산로는 곧장 마애여래입상이 자리한 왼쪽의 계곡길과 오른쪽의 임도로 나뉜다. 서운산을 찾는 대부분의 등산객은 단풍나무숲이 울창한 완만한 임도를 따라 산을 오른다. 길은 끊임없이 굽이지며 정상까지 완만하게 이어진다. 정상을 800m쯤 남겨둘 무렵 기존 등산로와 신규 등산로 안내판이 나오는데, 그 지점부터 길이 다소 가팔라진다. 이윽고 산마루가 보이고 서운산 정상에 선다.

 

정상의 전망데크에 서니 북서쪽으로 조망이 트인다. 야트막한 산들이 구릉지대를 형성한 곳에 안성 제4 일반산업단지, 공도읍, 진령봉, 안성 제2ㆍ3 일반산업단지, 안성시청 등이 내려다보인다.

 

서운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완만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정상 주변의 데크와 쉼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떠들며 쉰다. 기타 반주에 노랫소리가 숲을 울리기도 한다. 막걸리 잔술을 파는 상인들 주변은 더욱 떠들썩하다.

 

 

서운산은 금북정맥의 산이다. 금북정맥은 칠장산(492.1m)에서 한남정맥과 갈라져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후 칠현산(516.5m), 덕성산(521.8m)을 일구고 배티고개, 서운산, 엽돈재를 거쳐 위례산(523m)과 성거산(573.4m)으로 이어지다 태안반도 지령산에 이르러 산세를 끝낸다. 그 길이가 240km에 이른다.

 

서운산은 동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금북정맥뿐만 아니라 서너 개의 산줄기가 동서남북으로 휘저으며 복잡한 산줄기를 이룬다. 마치 청룡이 한바탕 용틀임을 한 모양새다. 정상만 올라섰다가 곧장 하산하면 서운산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없다. 이 산 정상과 서쪽 봉우리격인 탕흉대에 이르는 남쪽 산자락에는 문화유적지가 꽤 많이 흩어져 있다. 산중 사찰 좌성사와 은적암을 비롯해서 홍계남 장군이 임진왜란 때 진지를 구축한 서운산성과 용굴, 석조여래입상 등은 진정 이 산의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서쪽 봉우리인 탕흉대로 향한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능선길이다. 도중에 은적암과 좌성사로 내려서는 길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나 있지만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딱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탕흉대

서운산 서쪽 끝에 위치한 바위턱에 도착하니 '앞이 확 트인 높다란 둔덕'을 뜻하는 탕흉대다. 자연적인 바위 봉우리에 인위적으로 돌과 흙으로 축대를 쌓아 올린 형태다. 이곳 역시 정상과 마찬가지로 북서쪽으로 조망이 펼쳐진다. 다만 안성을 비롯한 평택 너머로까지 더욱 광대하다. 바닥의 바위에는 '탕흉대'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서면 "모든 희로애락이 가슴속에서 속 시원하게 바람과 함께 아득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탕흉대를 내려선다.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숲길을 벗어나 좌성사로 향한다. 수풀과 잡목이 우거진 한적한 산길이다. 지대가 평평한 곳에 도착하니 거대한 바위 아래 용굴이 보이고, 인근에는 샘터도 있다.

 

원시림을 헤치고 가니 너른 터에 팔각지붕을 이룬 서운정이 서 있고, 그 뒤편에서는 석조여래입상이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이곳은 의병장 홍계남 장군과 이덕남 장군이 쌓은 서운산성의 한가운데로 지휘본부인 장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홍계남 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쳤던 격전의 현장이지만 현재는 수풀만 우거져 있을 뿐이다.

 

서운정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니 숲 너머로 조망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곳에 좌성사가 나온다. 한적하고 조용한 사찰이다. 좌성사에서 은적암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가을 햇살을 머금은 시퍼런 단풍나무숲이 거대한 터널을 이루며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은적암, 태조 왕건이 3년간 은거했던 암자

청룡사 갈림길을 지나 은적암으로 향한다. 그대로 하산했더라면 한걸음에 청룡사에 닿았을 것이다. 청룡사는 남사당의 본거지다. 그 남사당패를 이끌던 여장부 바우덕이가 살던 불당골과 사당 등이 청룡사 인근에 있다. 짧은 고개를 두어 개 넘어서니 은적암이다. 서운산 정상 남쪽 7부 능선쯤에 자리한 은적암(隱寂庵)은 태조 왕건이 3년간 은거했다는 곳이다. 현재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의 건물만 남아 있는데, 건물 형태와 색감이 이색적이고 강열하다. 게다가 산신각 안에는 특이하게도 샘터가 자리한다.

 

은적암에서 서운산 정상으로 향한다. 능선길이 제법 가파르다. 정상에 오른 후 동쪽으로 뻗어 내린 금북정맥 마루금을 타다가 배티고개 갈림길에서 석남사를 향해 내려선다. 예상치 못한 가파른 능선길이다. 길은 능선을 벗어나 계곡을 만난 후에야 경사가 누그러진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시원스런 물줄기를 따라 석남사에 도착할 무렵, 마애여래입상 이정표가 나온다. 길에서 50여 m 떨어진 오른쪽 산기슭에 올라서니 암벽에 5.3m에 이르는 마애여래입상이 양각돼 있다. 넓적한 얼굴에 눈코입이 두텁게 표현돼 있고, 두 귀는 어깨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특히 하단 연꽃 문양의 대좌 위에 올라간 뚜렷한 모양새의 10개의 발가락은 너무도 귀엽고 앙증맞게 생겼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천년고찰 석남사

안성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 서운산이다. 서운산 남쪽 기슭에 청룡사가, 그 너머 동북쪽 기슭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 말사인 석남사가 있다.

 

313번 지방도로를 타고 배티고개를 넘어 호젓한 산길로 접어 들어 10여 분 올라가면, 세월의 무게와 역사의 기품을 간직한 천년 고찰 석남사가 푸근하고도 웅자한 자태를 드러낸다. 큰 절은 아니지만 곱게 매만진 흔적에 서리서리 정성이 녹아 있다.

 

서운산의 한 기슭에 조용히 자리한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후 수많은 승려들이 머문 거찰이었다고 한다. 산정에 기댄 대웅전과 바로 아래에 영산전이 있는데, 가람 전체의 무게가 이 두 전각에 육중하게 실려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 옆은 손끝에서 묻어난 정성으로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시구를 연상케 한다.

 

봄이면 철쭉이 환히 길을 밝힌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당대의 고승 석선(奭善)이 개산하면서 창건했다. 그 후 문성왕 18년(856) 가지산문의 2조인 염거국사(廉居國師)가 주석하면서 중수했고, 고려 광종의 아들 혜거국사(慧炬國師)가 크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다. 따라서 이들 스승을 흠모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들어 수행지도를 받았으니,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

 

이에 세조는 석남사의 전통을 살리고 수행도량의 면모를 지켜나가도록 당부했다. "석남사에 적을 둔 모든 승려의 사역을 면제하니 수도에만 전념토록 하라"는 친서교지(親書敎旨)를 내렸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를 당하고 영조 때 해원선사(海源禪師)가 중수했으나 본래의 절 모습을 되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웅전과 영산전뿐이지만, 영산전(보물 제823호)은 조선 초기 건물의 특징 양식을 손색없이 지니고 있어 당시의 절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석남사에는 현재 영산전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인 대웅전, 향토유적 제11호인 고려시대 오층석탑 2기가 있고, 절 입구에 향토유적 제28호인 석종형 부도 2기가 있다. 절 왼쪽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상이 있어 만나볼 만하다.

 

석남사는 계단식으로 3단의 축대를 쌓아 대웅전과 영산전, 한 채뿐인 요사채가 있지만 넓은 공터가 많다. 삼면을 산줄기가 에워싸 다소 답답한 감이 없지 않으나 앞골이 트이고 계곡물이 절 앞으로 흘러 시원스럽다. 석남계곡은 특히 승방골ㆍ주왕골ㆍ험한골ㆍ대밭골ㆍ방아골 등 열두 굽이가 있으며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앞을 가린다. 그 뒤 산 정상으로는 서운산성이 둘러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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