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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3)

by 3000포석정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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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해인사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서로 잇대어있는 가야산에 위치해 있다.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은 북으로는 성주와 고령, 남으로는 거창과 합천의 네 군 사이에 우뚝 솟아 경상도를 남북으로 가르고, 충청, 경상,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을 서쪽에 두고 있다. 가야는 우리말로 가람(江)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또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행하신 인도의 붓다가야의 가야산에서 그 이름을 따 온 것이라고 한다. 해인사의 가람 배치는 가야산에 똬리를 틀어 큰 바다에 배가 가고 있는 모양으로, 탑이 돛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바위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해인사의 기를 꺾기 위해 바위를 없애는 바람에 근래 들어 이 탑을 지었다고 한다.

 

해인사는 화엄종에 입각해 세운 화엄 십찰 가운데 하나로 신라 시대의 고찰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2대 교구 본사이다. 한국 불교 최초로 총림으로 선원, 율원, 승가 대학(강원)을 갖추고 있다.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사찰 가운데 한 곳이며,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어서 법보사찰이라고 부른다. 해인사는 대방광불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라는 구절에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서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그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래 모습이라는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해인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해인삼매에 젖어 느긋하게 산책할 수 있는 길이다. 해인사 주차장 바로 옆 성보박물관에는 해인사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나타난다.

 

 

 

해인사가 부처님의 법을해인사가 부처님의 법을 기리는 법보사찰로 성지화된 것은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9년에 강화도 선원사에 있었던 고려대장경을 이전 봉안하면서부터다. 경내 장경각에 보존 중인 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경(經), 율(律), 론(論) 삼장(三藏)으로 고려 시대 거란과 몽골의 침입에 맞서 부처님의 원력과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고려인의 열망을 담았다. 1011년(고려 현종)에 착수하여 약 240년 동안 완성한 세계 최초, 세계 최고의 목판본으로 판수가 8만 1천350장에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 화재속에서도 살아남은 「팔만대장경」 

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 대장경은 현종 2년인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회향시켜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었지만, 1232년(고종)에 몽골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뒤 무신정권 아래 최우가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 하여 16년 만인 1251년에 회향한 불사가 바로 지금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현존하는 목판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 면에서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불교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찬란한 기록문화로서의 가치도 엄청나다. 팔만대장경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6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해인사에는 조선 시대 7차례에 걸친 대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건물이 잿더미로 변했는데 유독 대장경판을 간직한 전각만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故 김영환 장군, 문화재청>

 

▣ 해인사를 폭격해라!

현대에 와서 또 한 번의 위기는 6.25 한국 전쟁 때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퇴로가 막힌 북한군들이 경남 합천 해인사를 점령했다. 1951년 9월 18일, 공중폭격 작전이 결정되자 정찰기가 폭격 지점을 해인사 한복판으로 가리켰고,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4대의 전폭기에 각각 500파운드 폭탄 2발씩과 5인치 로켓탄 6발씩을 장착하고 떴다. 김영환 대령의 1번기는 폭탄 대신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했는데 한 방에 해인사를 불바다로 만들 무기였다. 해인사를 눈앞에 두고 긴박했던 순간 김영환 대령은 전 편대원들에게 긴급 발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선회만 하고 폭격하지 않자 상부의 폭격 명령 교신이 계속 내려왔다. 김영환 대령은 산을 넘어 성주 지역 인민군에게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가 버렸다. 명령 불복종에 대한 문책 경위를 밝히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미군이 교토를 폭격하지 않는 것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을 잡겠다고 팔만대장경을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였다. 위기 속에서 리더 한 사람의 판단과 식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준장으로 승진한 김영환 장군은 1954년 순직하였다.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삼존불,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해인사의 유서 깊은 전각들

사원의 큰 법당에는 부처상이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큰 법당의 이름은 그 안에 모신 주불에 따라 결정된다. 그 주불이 바로 그 사원의 정신적인 지주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 Vairocana에서 온 말로써,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주인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 자리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적광전 위에는 장경판전이 자리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더욱 뜻깊다. 국보 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초 무렵인 1488년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으로 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고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동의 건물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간판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이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에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각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창이 윗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법보전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

 

<해인사 대비로전>

 

2007년 11월 24일 정면 3칸, 측면 3칸 그리고 다포형식을 가진 대비로전을 낙성하고 대적광전과 법보전의 ‘동형쌍불(同形雙佛)’인 두 비로자나 부처님을 나란히 안치하였다. 쌍둥이 비로자나불은 2005년 7월 개금 하는 과정에서 불상 내부에 문서가 발견돼 883년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국내 최고(最古)의 불상임을 확인하였다. 신라 시대 진성여왕 때 대각간 김위홍과 아내 강화 부인이 발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성여왕은 삼촌인 김위홍을 몹시 사랑했고 정사를 맡겼지만 즉위 이듬해 김위홍이 죽자 몹시 비통해했다. 후세 사람들은 살아생전 못다 이룬 사랑을 사후 세계에서라도 함께하라는 염원을 보냈다.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1)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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