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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남원 실상사, 신라 불교 사상과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 탄생 배경(2)

by 3000포석정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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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는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남원 실상사 전경,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구산선문 실상산파(實相山派) 탄생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스님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스님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826년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 줬고 왕은 선강태자(宣康太子)와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산파(實相山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 실상사의 전소와 중건

세조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 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 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남아있던 철불중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높이 2.7m)은 통일 신라 말 지방의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만든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무릎 아래와 두 손은 1986년 복원하였다. 두리뭉실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러운 얼굴, 넓은 가슴에 갸름한 허리 등 신라시대 불상 특징을 이어받았지만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 등 온유함과 생동감을 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리 신라 말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좌)와  백장암 삼층석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또한 백장암은 실상사와는 5km정도 떨어져 있으나, 지금의 실상사가 중건되기에는 백장암에서 기거하던 승려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또한 백장암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으며, 이 탑은 통일 신라시대에 만들어져 무려 1천 년 이상을 살아온 석탑이니 실상사만 둘러보지 말고 백장암도 같이 둘러보고 가시기 바란다.

 

▣ 호국 사찰로서의 실상사 역할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남원 실상사 보광전과 동종,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중요 민속자료로는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또는 1934년) 홍수 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 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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