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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

봉암사, 살아 생전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사찰(2)

by 3000포석정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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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봉암사 일주문 전경(좌)과 봉암사 희양산 전경(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서기 879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여있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그 후 봉암사는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그런데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된 것을 1995년 금색전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으나,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과 남고 전소되었고, 1956년 4월 7일에도 큰 화재로 소실되었다. 극락전은 목탑형으로 건조된 건물로서 경순왕이 피난 때 원당으로 세운 유서 깊은 전각이라고 한다.

 

<문경 봉암사 극락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1]중의 하나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깊은 사찰인 덕분으로 한때 폐사 위기에 까지 이르렀지만 이제는 증창을 거듭해 옛 모습을 되찾고 많은 수도승이 운집하여 수도에 전념하고 있다. 대가람 중수 불사가 계속되어 1992년 6월 4일에 대웅전이 완성되었다. 대웅전은 108평의 웅장한 건물이며 삼존불을 모시고 목각형 또한 뛰어난 솜씨로 수작으로 매우 장엄하다. 희양산 일대는 경관이 수려하여 고운 최치원선생의 유적이 여러 곳에 전한다.

 

 

<봉암사 국보 지증대사탑비(좌)와 봉암사 삼층석탑(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통일 신라시대의 삼층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증대사탑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로 신라 경애왕(서기 924년)에 세운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비문은 신라시대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분황사의 83세 혜강 노스님이 글을 쓰고 새겼다. 또한 희양산문이라 하면 당나라에까지 그 실력과 수준이 인정된 선지식의 교단이라고 높이 평가되었다고 한다.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 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라고 한다.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과 백운대 전경,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곳이 봉암사였다. 이곳에서 한국 불교를 바로잡자고 다짐을 하고 수행에 들어갔다. 이것을 봉암결사라고 한다.(여름과 겨울 3개월 안거에 들어가는 것을 결제라 하고, 9개월 이상을 결사라고 한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 된다. 그 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현재 봉암사는 조계종 스님들의 선수련장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특별히 매년 부처님 오신 날만 개방한다. 천년을 물려온 봉암의 탑과 부도, 법당을 보고 싶어 하는 답사객들도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산문이 열리는 부처님 오신 날 시간이 된다면 일생에 한 번쯤은 방문해보고 싶은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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