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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139

일주문(一株門), 산문(山門)에 들어서며(1) 어릴 적 수필집에서 '산문(山門)에 들어서며...'라는 구절의 수필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사찰은 산에 있으니 산에 있는 문(門)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산문은 보통 삼문(三門) 또는 산문(山門)이라고 불린다. 산문(山門)의 순서는 대개 일주문(一株門), 천왕문(天王門) 또는 금강문(金鋼門), 불이문(不二門) 또는 해탈문(解脫門) 순으로 되어있고 일주문(一株門)부터 통과하여 사찰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사찰(寺刹)은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 도량이자 불법(佛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건축물이다. 스님들은 사찰에 머물려 수행 정진하고 부처를 대신해 깨달음의 내용을 전달하여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장소이기도 한다. 사찰은 많은 대중들이 모여 살며 집회를 하.. 2023. 3. 9.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탑(塔)의 기원과 시대별 형태 탑의 기원 산문(山門)을 통과하여 사찰 경내에 진입하게 되면 가장 먼저 사찰의 중앙에 위치한 탑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찰을 방문하게 되면 탑보다는 불전(佛殿)을 먼저 방문하고, 탑을 불교신앙의 대상이 아닌 오래된 역사적 문화 유물로서 그저 바라볼 뿐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불교 신앙으로서의 탑의 본질적 가치를 알고 있지는 못한다. 탑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의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인 '투파(thupa)'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인데 원래 '무덤'이란 뜻이다. 많은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고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다비[1]했더니 수많은 신골(身骨)과 사리[2]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때 제자들이 부처님 사리를 서로 더 많이 가져가 탑을 세우려고 했는데, 나.. 2023. 3. 7.
화성 용주사, 조선시대 왕릉과 수호사찰 능침사(陵寢寺)(3) ​조선시대 정조 왕의 삶과 통치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지니고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에 비견될 만큼 비극적인 이야기이고, 정조 시대의 문화 융성과 수원 화성 등과 같은 건축의 발전은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만큼 찬란하게 발전하였고, 정조의 영특함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만큼 크고 위대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장조의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1762년 음력 윤 5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 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 2023. 3. 6.
인제 백담사, 일제 시대 우리 민족 선각자들 정기가 어린 사찰(3)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위치한 내설악의 명찰인 백담사(百潭寺)는 일제감점기 때 독립운동을 주도한 만해스님의 수행처로 유명하다.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에 자리 잡고 있는 백담사는 예로부터 사람이 좀처럼 찾기 힘든 구중심처의 수행 도량이었으며, 지금도 방문하기에 쉬운 사찰은 아니다. 백담사에 가기 위해서는 공용주차장에 주차 후 버스로 18~20분 타야 되며 만약 걸어간다면 7km로 2시간 종도 소요되는 거리다. 만해스님이 저술한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해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했다고 한다. 이후 1772년(영조 51)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용대리로 이전해 백담사로 개칭했다. '백 번째 연못자리에 세..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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