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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사찰 여행139

신라 불교 사상과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 탄생 배경(1) 구산선문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을 지켜온 아홉 산문을 가르킨다. 구산선문사찰의 탄생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신라 불교 사상의 흥망성쇠를 알아야 한다. 661년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마저 점령하기 위해 한창 통일 전쟁을 치르고 있었을 때, 신라의 승려 원효와 의상은 선진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현장 법사가 불교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고, 당나라 불교계의 새로운 바람은 신라에도 전해져서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기를 간절히 원했다. ▣ 화쟁사상과 천태종의 탄생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지나던 도중 충청도에서 날이 어두워져서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이때 원효는 자다가 갈증을.. 2023. 5. 11.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3) ▣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해인사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서로 잇대어있는 가야산에 위치해 있다.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은 북으로는 성주와 고령, 남으로는 거창과 합천의 네 군 사이에 우뚝 솟아 경상도를 남북으로 가르고, 충청, 경상,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을 서쪽에 두고 있다. 가야는 우리말로 가람(江)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또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행하신 인도의 붓다가야의 가야산에서 그 이름을 따 온 것이라고 한다. 해인사의 가람 배치는 가야산에 똬리를 틀어 큰 바다에 배가 가고 있는 모양으로, 탑이 돛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바위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해인사의 기를 꺾기 위해 바위를 없애는 바람에 근래 들어 이 탑을 지었다고 한다. 해인사는 화엄종에 입각해 세운.. 2023. 5. 5.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2) ▣ 화엄사(華嚴寺) 민족의 명산, 지리산 남서쪽 끝에 자리 잡은 전남 구례에는 화엄종의 본산인 천년고찰 화엄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화엄사는 승병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이 탔다. 인조와 숙종 때 다시 지었으며, 이때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을 건립했다. 화엄사 사적기에 따르면 창건 연대가 추정만으로 이어져 오다 화엄사가 화엄 사상의 근본 도량이 된 중요한 계기는 의상대사 보살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 후 귀국, 화엄사상을 알리면서 곳곳에 화엄도량을 창건 중수하였는데 이 시기에 화엄사도 중창됐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742~764) 시절에 8가람, 81암자를 둘만큼 대사찰로 확장돼 '남방제일 화엄대종찰'로 우뚝 서게 됐고, 조선 시대인 14.. 2023. 5. 4.
화엄사와 해인사, 전쟁 중에도 우리 손으로 지켜낸 문화재와 사찰(1)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자 퇴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프랑스 사람들의 자존심과도 같은 파리를 초토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어다.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앵발리드기념관에 2톤의 폭약을, 유서 깊은 노트르담 사원에 3톤의 폭약을,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 등 파리 곳곳의 유명한 유적들마다 각종 폭파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독일 총통 히틀러는 파리 주둔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 1894~1966) 중장에게 "파리가 연합군에게 점령되면, 후퇴할 때 파리의 모든 기념물 및 주요 건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파.. 202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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